동천의 집과 만난지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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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상우 작성일06-05-05 15:47 조회2,517회 댓글0건본문
2002년 1월 동천의 집에 이력서를 내고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 동천의 집에 들어서는데 빙상경기장 공사 중이라 땅은 다 파헤쳐져 있어 너무나 어수선 하였다.
면접시간이 다가왔다.
면접자들이 너무나 유식하고 똑똑하고 답변도 잘하고 외모들도 나보다는 좋아보여 떨어 졌구나 생각했다. 합격 소식이 역시나 오지 않았다.
발표 날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아 다른 시설에서 합격이 된 상황이라 짐을 챙기고 내일이면 가려고 했다.
이게 왠일인가? 발표 하루가 지난 아침 연락이 왔다. 합격 했으니 내일이라도 당장 서울로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짐은 다 챙겼으니 저녁 기차를 타고 청도 촌놈이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다.
드디어 아침에 동천의 집에 도착했다. 너무 일찍 도착하여 문이 모두 잠겨져있었다. 불러도 소리가 없어 2월의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면서 2시간을 밖에서 기다리니 출근 하는 선생님이 계셨다. 인사를 하고 3층으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동천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1주일은 무척 힘들었다. 담당을 맞지 않고 남자 방 선생님이 휴가면 지원하는 형식으로 근무했다. 일주일이 지나서부터 내 목소리가 동천에서 들리기 시작한 것 같다. 처음에는 L모 선생님께 혼나기도 많이 혼났다.그렇다고 혼나지만 않았습니다. 작은것 하나라도 챙겨주고 가르쳐 주신 은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그게 밑거름이 되어 지금의 내가 있는것 같아요.
4월이 되니 1,2과로 대대적으로 방을 이사를 했다. 3층에서 2층으로 내려오면서 두 달을 갓 넘긴 나는 201호 담당 교사가 되었고 1과장으로는 J 과장님을 모셨고 6명(석근,상룡,정수,금동,재훈,강서씨)의 가족들과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모든 선생님들이 지나가면서 한마디씩 하였다. 선생님 정말 힘드실 겁니다. 제일 힘든방을 맡게 되셨네요. 처음엔 그 말뜻을 몰랐다. 이전에 일 했던 곳은 중증요양 시설이라서 육체적으로 힘들었는데 여긴 대소변을 스스로 처리되니 그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하지만............!
역시 선생님들이 내게 한 말뜻을 이해되기 시작했다. 대변을 보고 난후 옷장에 넣어두는 가족, 수시로 뛰쳐나가고 자해를 하는 가족 방청소부터 목욕, 제대로 되는 가족이 없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내 손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중증시설이면 교사가 하기에 따라서 그 방의 환경이 달라지지만 여긴 아니었다. 금방 청소하고 뒤돌아서면 난장판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담배 피우는 개수만 널어나 어느 날부터는 2갑을 하루에 피우고 있는 게 아닌가.....그때부터 화초를 방에 한 개 두 개 키우기 시작했다. 가족들도 처음에는 화초를 심으면 뽑아 버렸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새싹이 올라오면 신기해서 너무 가까이서 보다가 만져보곤 했다. 화초는 잘 자라기 시작했다.
난 경상도 토박이라 사투리도 심하고 말하는 투도 화난 사람같이 목소리가 커서 선생님들과도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다. 나만 힘든 방을 맡은 것 같고 서울 생활도 지치기 시작하여 사표도 한번 썼다. 사실 갈 곳도 없었지만 그냥 마냥 사표를 내고 수리되기를 기다리는데 수리는 되지 않고 동천의 큰사랑으로 날 잡아 주는 것이 아닌가..............
그때 잡아준 모든 분들이 너무나 고맙고 고마웠다.
목소리는 여전히 커지만 그날 이후로 새로운 마음으로 동천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회의 시간에 선생님들과 다투고 근무 할 때도 시비가 붙고 나만 끼면 말다툼이 벌어지곤 했는데 날 잡아주고 힘이 되어 준 분이 과장님이시다. 지금은 나만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대화에서 내가 끼지 않으면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혼자 생각해본다.
이때쯤 뚱띠 3을 결성하게 되었다.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저녁이 되면 수시로 고기와 맛있는 밥을 찾아 헤매곤 했는데 자연스럽게 친해지기 시작했다.(사실 동천의 집 선생님과 모두 부담없고 친하고 지낸다. 상조 회장만 3선이다.ㅋㅋ) 살은 점점 찌기 시작했고 운동하기도 싫어했다. 검진 받으면 충격이었다. 그래서 담배도 한순간에 끊어 버렸다. 너무나 잘한 일인데 살은 더 찌는 게 아닌가. 주위 선생님들의 걱정도 들어오지 않았다. 먹는 게 행복이었으니깐 ....(지금은 열심히 다이어트 하고 있답니다.*^^*)
1과를 떠날 때쯤 과장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아무 쓸모없는 김상우를 이제 조금 인간 만들어 놨더니 2과에서 빼앗아 가버리네” 뒤돌아 생각해보면 정말 나 자신이 많이 변해 있었다. 과거의 내가 아니었다. “과장님 너무도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 봅니다.” 나 자신도 1과를 떠나기 싫어 과장님께 불평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2005년 2과로 발령을 받았다.
2과에서는 개인적으로는 모두 친했지만 업무상으로는 1과와 너무나 달라 힘들었다. 서류를 하면 두 세 번 씩 고치는 것은 예사가 아니었다.하지만 그래도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것같다. 대리님이 잘 가르쳐 주셨고 힘들때면 밤에 '상우야 한잔하자 나온나'같은 공릉동에 살았기에 외롭지 않았다. 맛있는 반찬을 하시는 날에면 혼자사는 노총각ㅋㅋ 생각에 갔다주시곤 하셨다. 겨울철에 김치를 담그면 누구 할것 없이 갔다 주셨다. 겨울철에 없어서는 않되는 김치치는 떨어질 날이 없었다.2과는 새로운 분위기였지만 주위의 많은 선생님들이 도와 줘서 잘 극복했다.정말 친 동생처럼 친가족보다 더욱더 날 챙겨 주셨다. 너무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이때부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s대학에 편입해서 부족하지만 그래도 사회 복지를 공부하게 되었다. 성인기 가족들을 맡게 되니 아동기 가족보다는 편했다. 3,4호 선생님들은 아이들 찾으로 다니기 바쁜데 성인기 가족이라 의젓하여 공부도 열심히 할 수 있었다. 시험 기간에는 실장님부터 과장님 모든 선생님들이 집에서 잠도 잘 못 잤으리라 문제를 풀다가 모르면 밤 12시에도 전화로 묻곤 했다. 도와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현재는 자격증도 2개나 생겼답니다.)
난 정말 복이 많은것 같다.
1과든 2과든 모든 선생님들이 휼륭하신 분들만 있어 행복 했다.
비록 타지에서 생활하지만 더 많은 가족들이 생겼다고 생각이 든다.
4년을 보내면서 선생님들도 많이 바뀌었다. 새로 오실때마다 왜그리도 능력이 좋은 분들만 입사를 하든지 나의 위치가 위태롭기 까지 했다니깐요 ㅋㅋ
2과에서 생활하면서 직업재활 훈련에도 참여했다. 생소한 일이라 힘들었지만 원예작업을 통해 여러 가지를 만드니 작품이 되었다. 하지만 직업재활과 방일을 다 보려니 힘들었다. 서류는 다른 호실 선생님들이 다 내고 쉬고 있으면 그때서야 꼴찌로 내기가 일수였다. ^^ 중간에서 대리님(지금은 과장님)이 많이 이해를 하고 많이 가르쳐 주셨다.
2006년 3월 또다시 부서 이동이 있었다.
직업재활로 내려가라고 했다.
또다시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해야한다는 두려움에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의논해 주었다.
이제 직업재활실로 내려 간지 1달이 넘었다. 납품에 교육에 무척 바쁘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시간도 무척 빨리 지나가 버려 늦게 퇴근하는 날이 많은 것 같다. 생활 실에 있을 때는 ‘사무실 선생님들이 뭐가 그리 할 일이 많이 맨 날 늦게 가나? 근무시간에 열심히 하고 가지 근무시간에는 뭐하고 ..............늦게 가나?’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닥쳐보니 그런 생각을 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직업 재활 실 가족들과 지내다 보니 힘들지만 그래도 부족하지만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 (사실 원예작업하면서 작품을 못만든다고 구박을 받아요 ㅠㅠ)부족한 절 이해해주고 하나라도 가르쳐 주려고 하는 대리님. 정말 대단해요~~~오.
동천의 집은 참 대단한 것 같다.
한없는 사랑으로 날 변화시켜준 나의 첫사랑 1과 → 전문 지식과 배움의 기회를 준 2과 → 현재의 직업재활에서는 어떤 것이 나에게 담겨질까 무척 기대된다.
비록 짧은 동천의 생활이었지만 내게 많은 것을 안겨준 동천을 난 사랑합니다.
알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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