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에스더의 본명은 김점동이다. 에스더는 세례명이고
남편 박유산의 성을 따랐다. 당시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신여성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평등한 서구 여성의
지위를 동경해서 남편의 성을 따서 이름을 짓는 것이
한동안 유행이었기 때문이다. 박에스더는 아버지가
감리교 초대 선교사였던 아펜젤러의 집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되면서 서구 문물과 인연을 맺었다. 정동에 감리교
선교사였던 스크랜턴 부인이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학생을 모집하자 아버지의 후원을 받아 입학했다.
에스더의 언니는 정신여학교 교사였고 동생은 세브란스
간호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교육열이 높은 집안이었다.
이화학당 시절 박에스더는 영어 실력이 뛰어나 이화학당
교사이자 의사인 셔우드(Rosetta Sherwood)의 통역을
맡았다. 셔우드는 동료 의사 홀과 결혼해서 홀 부인으로
불렸다. 박에스더는 자신의 의지와 홀 부인의 주선으로
미국에서 의학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미국에
혼자 보내길 꺼리는 부모의 권유로 병원에서 일하던
동료 박유산과 결혼해서 함께 떠나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 대학교)에 입학했다.
부인이 공부하는 동안 남편은 농장에서 일을 해가며 후원하다가 병을 얻어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박에스더는 고생 끝에 의대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로 양의사 자격을 얻게 되었다.
한국 최초의 양의로 알려진 서재필이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한 지 7년만의 일이었다.
귀국한 박에스더는 여성전용병원인 보구여관(동대문부인병원의 전신)에서 진료를 했다.
연간 수천 명의 환자를 휴일도 없이 돌보고 평안도, 황해도 지역으로 가마를 타거나
당나귀를 타고 진료하러 다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진료뿐 아니라 영어교재를
한글로 번역하고 성경과 위생교육도 해가며 과중한 업무를 해내던 박에스더는
안타깝게도 삼십 대의 이른 나이에 폐결핵과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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